러시아 뉴스

와인·치즈 수입 막히자… 러시아, 식료품 '신토불이' 열풍

danny 0 791
[서방 제재 맞서는 러시아]

- 러시아 농축산 업계 뜻밖의 호황

크림 합병후 서방 식품 금수조치

수입량 40%→22%로 줄었는데 오히려 작년 수출량은 5% 늘어

- 와인·치즈 등도 러시아産 각광

伊·佛, 러에 와이너리 설립 검토

푸틴 "경제 제재 전쟁에서 승리"

일부 "장밋빛 미래 오래 안갈 것"

모스크바=김효인 특파원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주부 이리나(56)씨는 지난 5일 식료품을 사기 위해 집 근처 마트 대신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작은 식료품점 '라프카라프카'를 찾았다. 이리나씨는 이곳에서 러시아 남부 크라스노다르산(産) 치즈, 로스토프나도누산(産) 계란 등을 구매했다. 그는 "같은 값이면 러시아에서 생산된 것을 사고 싶어 1, 2주에 한 번은 이 가게에 온다"고 말했다.

이리나씨가 방문한 라프카라프카는 2013년에 문을 연 '로컬 푸드 마켓'이다. 과일·야채·계란·고기 등 식재료뿐 아니라 치즈나 와인 등 기호 식품도 전부 러시아에서 생산된 것만 판매한다. 지금은 모스크바 내에만 가게 5곳이 있고,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라프카라프카뿐만이 아니다. 최근 모스크바에는 러시아산 식재료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 러시아산 재료만으로 요리하는 레스토랑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서방이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를 시작하자 러시아도 서방 식품에 대해 금수 조치를 하며 맞불을 놓았는데, 러시아 농축산 업계가 뜻밖의 호황을 맞고 있다. 수입 식품이 현저하게 줄어든 데다 일부러 러시아산을 찾는 '신토불이' 바람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수입 식품 빈자리 채우는 러시아산(産)

대러 제재가 시작되기 전인 2012년, 러시아는 국내에서 소비되는 농산품의 40%를 수입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 규모는 2015년 32%로 줄어들었고, 2016년 1분기 24%, 2분기 22% 등으로 감소하고 있다. 2014년에 62%에 달했던 소고기, 생선, 오리·닭 등의 수입식품 비중은 2015년에 52%로 10%포인트 감소했다. 기후 탓으로 수입이 불가피했던 야채와 과일의 외국산 비율은 각각 40%에서 35%, 90%에서 88%로 낮아졌다. 반면 지난해 러시아 식품 수출량은 전년보다 5% 증가한 100억달러를 기록했다.

지난 5일(현지 시각) 오후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의 로컬 푸드 마켓‘라프카라프카’에서 러시아인 주부 이리나씨가 장을 보고 있다. /김효인 기자

알렉산더 트카체프 러시아 농업부 장관은 "10년 전인 2006년에는 수입 식품량이 수출량의 4배에 달했지만 이제는 1.5배로 감소했다"며 "2020년까지 농축산물 수출액 220억달러를 달성하고 수입량을 넘어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와인, 치즈 등 기호식품도 '신토불이' 바람

특히 외국산이 선호되던 와인, 치즈 등 기호식품도 러시아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015년도 프랑스산 와인의 러시아 와인시장 점유율은 51.1% 감소했고 이탈리아산 와인과 스페인산 와인의 시장 점유율도 각각 33.8%, 24.6% 감소했다. 반면 러시아산 와인 공급이 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러시아산 와인 생산량은 2014년 85만 갤런(약 321만L)에서 2015년 115만 갤런(약 435만L)으로 크게 늘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에서는 러시아산 와인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와 레스토랑이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다. 라프카라프카의 매니저 빅토르씨는 "판매 중인 20여종의 와인이 모두 러시아산인데 이 와인을 사기 위해 가게를 찾는 손님이 많다"며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에 비해 저렴하고 맛도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러시아 기업들도 와인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러시아 2위 석유회사인 루크오일이 크림반도에 위치한 마산드라 와이너리에 투자하겠다고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대표 소믈리에인 드미트리 코발료브씨는 WSJ 인터뷰에서 "러시아 엘리트들이 국내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러시아산 와인을 즐기는 것이 애국심 있는 행동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에서 생산된 와인을 선호하자 이탈리아, 프랑스의 일부 와인 생산업체들은 러시아에 와이너리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이탈리아 바라치(Baracchi) 와이너리, 프랑스 리버 파테 보르도(Liber Pater Bordeaux) 와이너리 등은 올해 여름 잇따라 러시아 남부를 방문해 현지 와이너리와 농가 등을 살펴봤다. 리버 파테 보르도의 홍보 담당자 로이스 파스퀴에씨는 "크림반도는 와인 생산에 좋은 기후를 가졌다"며 "적절한 부지를 선정해 사업을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산 치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2012년 46%에 달했던 치즈의 외국산 비중은 2015년 20%까지 떨어졌다. 지난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치즈 페스티벌에는 러시아산 치즈를 맛보기 위해 수십만 명이 몰리기도 했다. 러시아 두브로브스코예 지방의 축산업자인 올렉 시로타씨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2014년에 처음 서방 식품 금수 조치가 시작됐을 때는 단순히 판매량이 늘어난 것만으로도 기뻤다"며 "지금은 우리만의 유제품을 개발해 프랑스산이나 이탈리아산 치즈와 겨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크렘린 "우리가 경제제재 승리자"… "근시안적 판단" 비판도

러시아 정부는 "경제제재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축배를 드는 분위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크렘린 외곽 정치 조직 '전(全)러시아국민전선'(ONF)이 마련한 포럼에 참석해 서방과의 맞제재를 가능한 한 오래 끌겠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맞제재를 통해 국내 농업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며 "국내 생산업자들은 현재 상황이 가능하면 오래가길 바라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양질의 상품을 좀 더 싼 값에 구매하길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최근 몇 년간 이어진 좋은 기후와 루블화 평가 절하 등 경제제재 이외의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근시안적인 판단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미국의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경제제재 이후 러시아의 식료품 가격이 14% 이상 상승해 올 상반기 러시아 가족 평균 지출의 35.5%가 식비로 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는 식비 비율이 11%에 불과한 영국의 3배를 넘는 수치"라고 말했다. 폴리티코는 "서민 경제가 흔들리는데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발생한 눈앞의 이득만으로 장밋빛 미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모스크바=김효인 특파원 hyoin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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