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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 - 러시아 역사

danny 0 676

러시아는 지구의 육분의 일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다. 러시아는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도 아니고 러시아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민족의 기원을 모르는 민족이다. 고대 러시아인이 남긴 '연대기'에 의하면 862년 노르만인 류릭이 노브고로드의 대공이 되었고 류릭 일족이 동슬라브인의 지역을 지배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 사이에 몇 개의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나라들이 있던 이 지역은 류릭이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시’로 불리게 되었고, 이 명칭이 후에 ‘러시아(Россия)’라고 하는 국명의 어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Россия’라는 단어는 중세 시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한 단어였으며, 루시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루시’라고 불렀다. (Русский)
러시아의 역사는 흔히 다섯단계로 나눈다. 첫째 고대 끼예프를 중심으로 그리스 정교회를 받아들여 찬란한 기독교문명을 이룩했던 끼예프 러시아 시대. 둘째, 징기스칸의 자식들에게 침략을 받고 그 지배를 받던 몽골-따따르의 멍에(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 시대. 셋째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몽골 세력으로부터 독립하던 시대. 네째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 러시아 시대. 다섯째 볼셰비키 10월혁명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쏘련) 시대. 그러므로 지금 러시아는 여섯 번째 역사의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정신은 러시아의 광대한 자연으로부터 발생한 대지주의적 정신과 정교회 신앙으로 형성된 기독교 정신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쟈에프(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рдя́ев, 1874~1948)라는 사상가는 ‘러시아인은 너무나 광대한 자연에 의해서 상처받은 민족’이라고 말했다. 톨스토이가 쓴 글처럼 「인간에게는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 고작 자신이 누울 세평이면 족하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신들이 관리하기에는 너무나도 거칠고 광대한 영토를 가짐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광대한 권력구조 관료체제를 필요로 하게 됐다. 이게 러시아인을 괴롭힌 상처의 원천이라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언제나 제정 러시아 시대나 쏘련 시대나 지금도 거대한 관료체제로 유지된다. 그러니 거기서 온갖 권력투쟁과 부정과 협잡과 음모와 희생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이 광대한 대지와 싸우면서 러시아인은 지극히 관대하고 선량하면서도 지극히 잔혹하고 잔인한 성품을, 더불어 온갖 미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가지게 됐고 그것은 다시 현실의 관료체제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있다.
 
988년. 끼예프 대공국의 블라지미르 1세가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 나온 성직자들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동방정교회(러시아정교회,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비잔틴 수도사 끼릴과 메포지 형제에 의해 교회슬라브어가 만들어진다. 나중에 이 교회슬라브어가 러시아 구어와 결합되어 초기러시아어가 탄생했다. 이 ‘끼옙스까야 루시’를 중심으로 찬란한 정교회 문화가 꽃피운다. 어떤 설명들을 보면 그 문화의 수준은 당시 세계 최상이었다고 한다.
정교회 신앙이 서구 로마 카톨릭과 구별되는 가장 큰 변별점은 신학적 관점의 피동성이다. 곧 서구신학에서는 신의 개념이나 설명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피력하고 증명해내려는 신학이 발전되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쩌구 저쩌구 하는 설명들이 신앙의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비잔틴 그리스 정교회 사상은 그러한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을 회의한다. 곧 십자가의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인간은 신을 이해하고 신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이 부정신학적 관점에서 정교회의 관심은 주로 지상의 부패와 다른 신의 거룩한 임재의 구현에 맞추어 진다. 따라서 이콘과 합창 의식 등 신의 임재를 경험케해주는 요소들이 중요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신학적 관점은 다시 사회현실이나 세상의 통치방식 같은 데로 연결된다. 곧 정교회적 신앙의 실제 형태는 동양적인 관조와 정신적 기풍의 요소가 다분하다. 다시 말하면 이 신앙 자체가 현실 권력 혹은 현상 체제에 대해서는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부정적으로 인식함으로써 기본적으로 저항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우울하고 어둡고 염세적이기도 하다. 앞선 대지주의와 정교회의 결합은 이렇게 러시아인의 독특한 정신세계를 창조해 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세계가 향후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 한가지 러시아인은 300년 동안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끼예프 러시아의 기독교문명은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에 의해 유린당하고 킵차크칸국의 지배아래 들어간다. 이 몽골지배는 러시아인의 정신세계에 뿌리 깊은 상처를 남겼다. 수치심과 우울함, 어두움과 극단적인 기질, 저항정신과 잔혹함 혹은 메시야사상과 반골기질 같은 것들이다. 곧 정교회적 부정신학을 더욱 더 깊어지게 만들었다. 고난받는 의인, 고난 받는 메시야, 러시아인의 구세적 사명 같은 개념들이 생겨났다.
 
쏘련 시대 영화감독 안드레이 따르꼽스끼(Тарковский,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1932~1986)의 <안드레이 류블료프(Андрей Рублёв)>같은 영화를 보면 이 시기가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몽골-타타르의 멍에(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라 불리는 이 시기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약 300여년간이다.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것이 모스끄바대공 드미뜨리 돈스꼬이 시절인 1380년 꿀리꼬보 전투의 승리로 인해서였다. 이후 모스끄바가 러시아의 중심으로 부각된다.
 
드미뜨리 돈스꼬이의 후예 이반 3세때 러시아는 완전히 독립되고 이반4세(뇌제) 시대에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짜아르(царь, 카이사르)’라 불리는 전제왕권이 성립된다. 이때부터 ‘모스크바 제3의 로마’라는 러시아적인 사상이 국가의 이념으로 성립된다. 즉 비잔틴 제국 제 2의 로마의 붕괴이후 모스크바 왕국이야말로 남아있는 세계 유일의 정교국이며ㅡ 러시아인이야말로 정통 기독교신앙을 지켜나가는 유일한 국민이라는 의식이 싹텄던 것이다.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수도승 필로페이라는 인물로 그는 이반 3세에게 상서를 올려 그를 ‘제3의 새로운 로마의 황제 폐하’라 부르고, “세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성스러운 사도(使徒)의 교회가 태양보다도 밝고 찬란하게 빛나는 나라는 폐하의 통치하는 국토를 제외하고는 달리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정통 기독교의 신앙을 가진 모든 나라들은 폐하의 판도 하에 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기하소서. 폐하는 오로지 이 하늘 아래 기독교 국가의 제왕이십니다. 모든 기독교 국가들은 폐하의 영토에 병합되어야 하고 두 개의 로마는 몰락했지만 제 3의 로마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제 4의 로마는 단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옵소서. 폐하의 기독교 국가만은 다른 나라들과 같은 운명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라고 밝혔다. 그때 이후 이러한 정교회 제 3의 로마라는 국가 이념은 러시아인을 짜아르=메시야라는 왕권에 복속 시키고 이 신앙고백이 국가의 백성이냐 아니냐를 시험하는 표지로 작용하게 된다. 타타르의 지배를 겪으면서 형성된 이러한 러시아인의 신적 사명의 이념은 오로지 러시아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단시 하는 경향으로 발전됐다. 정통 신앙은 러시아적인 것이며 러시아적인 것이 아닌 것은 정통신앙의 부패로 간주되었다.
 
이반 4세의 죽음 이후 동란시대를 거쳐서 그의 처가 로마노프 일족이 짜르에 추대되면서 로마노프왕조가 성립된다. 이 로마노프 왕가의 러시아제국을 건설한 사람이 뾰뜨르 대제(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이다. 뾰뜨르 이후 제1차 세계대전중 러시아 혁명(1917년 3월)에 의해서 타도될 때까지 약 200여 년간이 러시아제국의 역사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들이 있다. 1)러시아는 지리상의 이유로 동로마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였다는 점. 2)몽골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이점을 서유럽은 러시아에게 감사해야할 것이다) 3)유럽과 단절되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겪지 않았다는 점. 4)이 사이 정신문화적 종주국이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함으로써 정교회 세계의 유일한 종주국이 되었다는 점. 이러한 점들이 러시아를 유럽과 구분되고 아시아와 구분되는 독특한 러시아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러시아적이고 정교회의 부정신학적이고 제 3의 로마라는 구세적 사명을 지닌 러시아적 특징이 현실 역사 속에서 드디어 작동하게 되는 일련의 드라마적 역사가 이후 전개 되는데, 그 시발점이 뾰뜨르 1세의 서구화 개혁에 대한 러시아적이고 정교회적인 반발이었다.
17세기 말 뾰뜨르 대제는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서구화는 사실 불가피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더 이상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서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수입이 그랬던 것처럼 이 변화도 강력한 왕권에 강제적으로 실시됨으로써 러시아인의 대지주의적인 자유의 경향, 무정부주의적 저항의 경향, 보수적 세계관과 충돌을 일으킨다.
뾰뜨르 대제는 어린 시절을 권력에서 밀려나 감시와 경계 속에서 불우하게 자랐다. 그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민중들 속에서 특히 군대에서 지냈는데, 여기서 그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탁월함이 배양되었다. 그는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고 함대를 운영하는 법도 배웠다. 우여곡절 끝에 권력을 잡자 곧바로 과감한 서유럽화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는 신분을 속이고 군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해 여러 가지 근대적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가 유럽에서 본 것은 한마디로 러시아의 후진성이었다. 그는 모스끄바 중심의 동양적이고 낙후된 러시아를 개혁하고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 장소는 북방전쟁의 결과로 스웨덴에게 빼앗은 네바강의 하구였다. 버려진 늪지대였던 핀란드만(灣)에 거대한 돌과 나무기둥들을 박아 상뜨-뻬쩨르부르그(Санкт-Петербург)라는 새 수도를 건설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이 새 수도를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역사가 까람진(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мзи́н, 1766~1826)은 무수한 노예들의 가혹한 노동과 죽음으로 건설된 이 도시를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공사중 숨진 노예들의 시체를 그대로 습지에 수장시켰기 때문이다.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이런 사실들은 이후 이 도시가 가지는 모든 어둡고 병적인 그리고 영적이고 무언가 강력한 저항을 부르는 불안의 분위기를 반영하게 된다.
 
다음으로 뾰뜨르 대제는 강력한 전례개혁을 단행했다. 곧 서유럽의 로마 카톨릭과 분리되어 고립된 러시아정교회 전례를 카톨릭과 동일하게 개혁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사형을 당하거나 유형에 처해졌다. 그들은 옛날 전례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을 구교도, 혹은 분리파(Раскольники)라 불렀다. 이 분리파의 가장 극단적인 교파 중에 러시아 정교회의 모든 직제를 거부하는 무승파가 있다. 톨스토이의 최후 작품인 '부활'의 원고료로 톨스토이가 이주비용을 도와주었던 ‘두호보르(성령파)’도 이러한 정교회에서 이탈한 분리파에 기원한다. 분리파는 보이는 국가이념으로서의 정교회는 파괴되었다고 보았고, 따라서 현실 권력을 반기독교적인 사악한 정부로 인식하고 부정했다. 이 분리파야말로 러시아 고유의 종말론적 기독교 정신의 원천이다. 여기서 오로지 사회혁명을 위해 일체를 헌신하는 분리파적 인텔리겐치야가 태어났다. 정교회의 신자이건 반기독교적인 사회 혁명가이건 그들은 기본적으로 분리파적이다. 곧 지상의 권력에 대한 미움, 압제에 대한 반대, 고난받는 러시아의 궁극적 사명,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대망, 그것을 향한 역사로서의 역사의 의미같은 것들이다. 이 때 이후로 러시아 민중은 겉으로는 그것을 발표할 수 없었을지라도 정신적으로는 분리파가 된다. 황제와 귀족들의 권력은 그들에게 그들을 압제하는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발악으로 인식됐다. 물론 그들은 황제에 대해서는 끝까지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니꼰(전례개혁을 단행한 모스끄바 총대주교) 일당의 악마적 주술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황제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러시아 민중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 빋었다. 그러나 이 믿음이 깨어질 때 황제는 적그리스도가 되고 황제의 권력은 타도해야할 지상의 사악한 정권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뾰뜨르의 개혁과 전례개혁으로부터 러시아에는 두 가지 사상이 대립하게 된다. 하나는 서유럽과 같아져야한다는 ‘서구주의’와 러시아의 정교회적 특수성을 고수해야한다는 ‘슬라브주의’의 대립이다. 본래 강력한 전제왕권 확립을 위해 시작된 서유럽화는 역설적으로 외부적으로는 서유럽적 정신, 곧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계몽주의적 시민의식 같은 러시아적인 낙후성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하게 되고, 내부적으로는 그에 대한 러시아적 반동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자체 모순과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앞서 뾰뜨르 대제의 부친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는 전제왕권 강화를 위해 농노제(1649)를 성립시켰다. 이로 인해서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농노로 전락하고 국가 체제가 소수 귀족들의 국가로 확립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유명한 스쩬까 라진(Степа́н Тимофе́евич Ра́зин, 1630~1671)의 까쟈끄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까쟈끄 반란은 농노제로 인하여 도망친 농노들이 대거 그때까지 러시아제국의 직할통치에서 벗어나있던 돈 강과 드네프르강, 시베리아 등의 까쟈끄라는 자유민 전사집단의 일원으로 유입되면서 일어난 반란이다. 이 라진의 반란은 일찌감치 러시아 사회에서 농노제라는 모순을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뾰뜨르 시대의 이 농노제는 새 수도의 건설과 강력한 서유럽화정책을 위한 밑바탕으로 한층 더 강화된다. 그리고 이 농노제를 하나의 완벽한 사회체제로 확립시킨 인물이 예까쩨리나 2세 여제이다. 그녀는 오늘날 러시아 영토의 기초를 놓은 황제로 유럽으로는 우끄라이나, 남으로는 흑해연안과 까프까즈 동으로는 시베리아를 영유하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농노 6,000명당 귀족 1명이라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착취와 수탈의 결과로 이룩한 제국의 영광이었다. 한편 뾰뜨르 대제 이후 러시아 지식인들의 서유럽 여행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귀족계급사이에서 볼테르의 계몽주의, 루소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개혁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결정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이었다.
 
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은 계몽주의 사상, 프랑스 자국 내의 전례 없는 흉작, 미국독립전쟁 등의 영향을 받아 굶주림에 성난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일어난 체제 전복운동, 세계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다. ‘짐이 곧 국가다’ 라고 말했던 태양왕 루이 14세의 아들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혁명은 성공했지만 보수반동적인 쿠데타로 혁명정부는 다시 전복되고 이 와중에 혁명을 자신의 야망으로 변질시킨 사람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혁명을 보호하라는 시민적 요구로 파리에 입성한 전쟁영웅 나폴레옹은 도리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제정을 복구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교활한 정치가였던 그는 철저히 자신을 혁명의 대변자로 역설했다. 당시 유럽의 전제 왕권들은 프랑스 대혁명의 성공을 두려워하며 이 운동이 자국으로 번지지 않도록 검열을 강화했다. 특히 러시아는 이에 대해 민감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긴장상태에 돌입하게 되고, 1812년 6월 드디어 프랑스는 러시아를 침공했다. 이 전쟁을 러시아에서는 ‘조국전쟁(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812 года)’이라 부른다. 전쟁 초기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프랑스에 맞선 연합군은 대패한다. 러시아는 애꾸눈의 노(老)명장 꾸뚜조프 공작을 전선 사령관에 임명하고 보로지노 평원에서 프랑스 대군을 맞아 전투를 치른다. 이 전투가 나중에 똘스또이(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의 '전쟁과 평화 Война и мир'(1869)에 묘사된 주인공 안드레이 볼꼰스끼 공작이 전사하게 되는 전투이다. 실제로 똘스또이의 외종조부뻘인 세르게이 볼꼰스끼 공작은 이 전투의 전쟁영웅이었다. 1812년 9월 7일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양쪽 합쳐 250,000-350,000명의 군대가 뒤엉켜 싸운 끝에 최소한 70,000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결과는 러시아의 패퇴. 꾸뚜조프는 여기에서 유명한 모스끄바 청야작전을 벌인다. 곧 옛수도를 비우고 북쪽으로 주민들을 전원 소개시켜 버린다.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끄바에 무혈 입성했을 때는 초겨울이었다. 입성했을 때 그들은 하나의 거대한 폐허를 만난다. 병사들은 웬지모를 두려움에 빠져 몹시 술렁거렸고, 곧이어 화재가 발생해서 모스끄바 시가지 전부를 일주일간이나 태웠다. 그리고 곧이어 겨울이 닥쳤다. 현명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대지의 혹독한 겨울을 예감하고 퇴각명령을 내렸지만 이듬해 봄까지 퇴각하는 프랑스 병사들은 맨발에 여름옷을 걸치고 길이 지워진 겨울의 러시아에서 헤맸으며, 나중에는 진영자체가 와해되어 각자 구명도생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여기에 러시아 농민들의 게릴라 부대가 출몰하면서 나폴레옹 군대는 궤멸하게 된다. 1814년 3월 러시아군은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조국전쟁은 러시아인들의 민족의식과 자긍심, 고결함, 신앙심을 일깨웠다. 특히 진군하는 군대의 일원으로 파리까지 프랑스군을 추격했던 러시아군의 젊은 장교들은 이 전쟁으로 러시아가 개혁될 것을 더욱 열망하게 된다. 곧 러시아군이 서유럽 땅을 밟으며 본 것은 서유럽인들의 자유였다. 러시아의 농민들은 대부분 농노였지만 서유럽의 농민들은 자유인으로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이 이미 사회체제 자체를 과거로 돌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충격을 받았고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 역시 그러한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이 전쟁의 승리는 황제와 귀족들의 영광으로 돌아갔다. 모든 러시아 민중이 전쟁에서 러시아를 위하여 싸웠건만 농노는 다시 농노로 돌아갔고, 귀족은 다시 귀족이 되어 착취를 일삼았고, 구체제의 모순은 여전했다. 이러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시인 뿌쉬낀(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년 6월 6일~1837년 2월 10일)이다.
출처- 천정근 새물결플러스 ​러시아 문학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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